토트넘 홋스퍼가 자랑하던 DESK(델레 알리·크리스티안 에릭센·손흥민·해리 케인) 조합이 결국 해체됐다.
덴마크 국가대표 출신의 에릭센은 28일(한국시각)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이탈리아 세리에A 인테르 밀란행을 최종 확정했다. 계약은 2024년 6월30일까지이며 현지 언론에 따르면 에릭센의 이적료는 약 1750만 파운드(약 270원) 정도로 알려졌다.
에릭센의 거취는 이미 지난 여름 이적시장부터 뜨거운 화제의 중심에 놓여있었다. 토트넘은 에릭센의 잔류를 원했으나 결국 재계약에 실패했다. 스페인 명문 레알 마드리드 등 유럽의 여러 명문구단들이 에릭센에 관심을 보였으나 최종선택은 결국 인테르 밀란이었다.
에릭센은 2013년 네덜란드 명문 아약스를 떠나 프리미어리그에 진출한 이래 토트넘 유니폼을 입고 통산 305경기 69득점 89도움이라는 뛰어난 기록을 남겼다. 사실상 토트넘 공격전개의 시발점이자 조율사 역할을 담당하며 EPL에서도 최고 수준의 플레이메이커로 자리잡았다. 지능적인 찬스메이킹과 정교한 킥력, 성실한 수비가담과 활동량에 이르기까지 미드필더로서 모든 능력을 갖춘 선수였다.
케인-알리-손흥민-에릭센
토트넘은 2010년대 중반 이후 마우리시오 포체티노 감독 체제에서 케인-알리-손흥민-에릭센으로 이어지는 90년대생 공격 4인방을 중심으로 중흥기를 맞이했다. 이들의 이름을 딴 DESK 조합은 EPL에서도 손꼽히는 공격진으로 통했다. 모두 20대로 나이대는 비슷하면서 각자의 장점과 스타일이 상이한 선수들이 함께 성장해가면서 유기적인 조화를 이뤄 더욱 위력을 극대화할 수 있었다. 토트넘은 DESK 라인이 절정의 위력을 구가한 2016/17시즌 프리미어리그 2위, 2018/19시즌 UCL(유럽챔피언스리그) 준우승을 차지하는 등 구단의 역사를 새롭게 썼다.
하지만 정상에 오르기에는 늘 2% 부족했다는 게 옥에 티였다. 리그, FA컵, UCL에 이르기까지 우승까지는 항상 한두 발자국이 모자랐다. 중요한 경기에서 어이없이 발목을 잡히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은 역시 젊은 선수들 특유의 경험 부족과 무관하지 않았다. 희망고문을 거듭하는 동안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갔고 선수들의 위상과 거취에도 변화의 시점이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다니엘 레비 회장이 이끄는 토트넘 구단의 근시안적인 운영 행태와 매너리즘도 DESK의 해체를 앞당겼다. 토트넘은 최근 몇 년간 유럽에서도 이름을 떨칠만큼 구단의 위상이 급성장했지만, 신축구장 건립에만 집중하느라 우승 클럽으로 도약할 수 있는 장기적인 투자와 전력보강에는 소홀했다. 경직된 주급 체계로 인하여 박탈감을 느낀 주전급 선수들은 팀에 대한 충성도와 잔류 의지가 약해질 수밖에 없었고 에릭센도 예외는 아니었다.
토트넘은 에릭센이 보여준 성과에 걸맞은 특급 대우를 하여 그를 붙잡든지, 아니면 적절한 타이밍에 이적을 허가하고 이적료라도 챙겼어야했다. 하지만 애매한 태도로 일관하다가 이도저도 아닌 상황에 놓였다. 토트넘과의 계약만료 시점이 다가오면서 에릭센의 영입을 노리던 구단들은 이적료 지출을 꺼렸고 그도 팀에 남을 의사가 없음을 드러내며 졸지에 토트넘만 난처한 입장이 되고 말았다. 이적이 기정사실화되면서 에릭센의 경기력이 떨어졌는데, 이는 올해 토트넘의 하락세에도 영향을 미쳤다.
계약만료를 5개월 앞두고 그나마 겨울이적시장에서 인테르 행을 확정하며 돈 한푼 못받고 선수를 잃는 불상사는 피했지만, 에릭센의 전성기 시절을 감안하면 이적료는 사실상 헐값에 가까울 정도다. 반면 에릭센은 토트넘 시절에 비하여 주급이 4배 가까이 껑충 뛰면서 비로소 명성에 걸맞은 대우를 받게 됐다. 1년여간 줄다리기를 거듭해온 이적드라마의 최종승자는 에릭센이었던 셈이다.
빅4 진입 장담하기 어려움 토트넘
토트넘은 이미 간판 공격수 해리 케인이 부상으로 시즌내 복귀조차 불투명한 가운데 에릭센마저 잃게 되면서 비상이 걸렸다. 모리뉴 감독은 이적을 앞둔 에릭센을 주전에서 제외하곤 했지만, 정작 경기가 풀리지 않을 때면 후반에 에릭센을 교체 투입했고, 그제야 경기력이 살아난 경우도 많았다.
아무리 올시즌 경기력이 떨어졌다고 해도 에릭센의 찬스메이킹과 경기조율을 대체할 선수는 현재 토트넘에 없다. 구단이 에릭센의 이적 확정 시점과 맞물려 임대 영입했던 로셀소의 완전 이적을 서둘러 발표했지만 그가 당장 에릭센의 공백을 완벽하게 메울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이들은 많지 않다.
에릭센의 이탈과 DESK 라인의 붕괴는 어쩌면 시작에 불과할수도 있다. 토트넘은 현재 다음 시즌 챔피언스리그 티켓이 주어지는 빅4 진입도 장담하기 어려운 위기에 놓여있다. FA컵과 챔피언스리그가 남아있지만 지난 시즌보다 전력이 훨씬 약해진 상황이라 좋은 성적을 기대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올시즌 부상자가 유독 많은 토트넘은 케인 외에도 무사 시소코, 탕귀 은돔벨레 등이 전열에서 이탈했고 수비 불안 문제가 계속 지적되고 있지만, 레비 회장은 겨울 이적시장 막바지까지 눈에 띄는 선수 영입을 단행하지 않고 있다.
자연히 국내 팬들은 DESK 라인의 또다른 한축이었던 손흥민의 향후 거취에 신경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다. 손흥민은 프로 데뷔 이후 클럽에서는 아직 한 차례도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리지 못했다. 어느덧 28세로 30대가 얼마 남지 않은 데다 선수 인생의 전성기에 돌입한 손흥민에게도 또 한 번 전환점이 필요하다. 손흥민이 토트넘에서 많은 것을 이뤄낸 것은 사실이지만 앞으로도 이 클럽에서 미래를 기약해도 될지는 의문이다.
손흥민이 지금껏 순탄하게 커리어를 이어올 수 있었던 데는, 올바른 타이밍에 이적을 통한 돌파구를 모색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함부르크에서 레버쿠젠으로, 그리고 토트넘으로, 손흥민은 자신의 커리어를 한 단계 성장시켜줄 팀들을 선택해왔다. 손흥민을 EPL에 처음 데려온 포체티노의 경질에 이어, 에릭센의 이적은 손흥민에게도 많은 것을 시사한다. 변화를 모색해야할 시기에 올바른 선택을 놓치면 고생길이 열릴 수 있다. 지금의 토트넘은 아무리봐도 손흥민에게 우승 트로피와 선수 인생의 미래를 기대하게 해줄 만한 팀이 아니다.